그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이다. 혹한 한파에 보일러를 높이고 이불을 몇 겹이나 덮고서도 오한은 가시지 않고, 겨우 삼킨 밥알들을 모두 토해내고서는 온몸이 불덩이로 오른 나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검사결과 급성신우신염이란다. 나 같은 전신마비 장애인들은 스스로 배뇨가 불가능하여 매번 작은 고무호수관을 통해 인위적으로 소변을 빼내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요로에 감염되기가 십상이다.
40도의 고열로 눈의 초점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 간호사들은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고, 두 개의 얼음 베개를 가져와 하나는 머리에 하나는 옆구리에 넣어주었다. 그리곤 찬비 맞은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게 이불 대신 온몸에 거즈를 대고는 얼음만큼이나 차가운 알코올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살점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의 고통을 정말 이가 부서질 듯 악물고 견뎌야만 했다.
간호사들의 금과옥조 같은 처치 법으로 다행히 열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니 숨쉬기가 수월하다. 다친 이후, 간혹 이렇게 반갑지 않은 아픔이 찾아와 나를 괴롭힐 때마다 마치 아련한 추억처럼 떠올려지는 곳이 있다. 때때로 그곳의 기억은 지치고 힘든 내 삶에 자양분이 되어 “이런
고통쯤이야.” 하며 새롭게 나를 일으켜 세우곤 한다.
유치원교사로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29살의 봄날, 꿈에도 생각지 못한 교통사고가 났다. 마주 오던 차와 부딪힌 순간 창밖으로 튕겨 나간 나는 목뼈가 부러지면서 모든 신경 줄이 끊어졌다.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서 다행히 의식은 돌아왔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가슴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따님은 이제 다시는 걸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평생을 누워
서 지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의사의 사형선고 같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엄마는 절망에 빠
진 나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큰 재활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순간 우리 모녀를 향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한 번의 절망이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내 엉덩이 꼬리뼈에 생긴 욕창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엄마도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욕창은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눌린 피부가 압박되어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궤양으로, 내 엉덩이에 생긴 욕창이 어느 정도 상태인지 난 알 수 없었고 감각이 없으니 아픔 또한 느끼지 못했다. 나를 대신해서 욕창을 지켜보고, 아파하고,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옆에 계신 다른 환자의 욕창을 우연히 보게 됐다. 나와 똑같은 위치에 거무스름하게 살이 썩어들어가 뼈가 보일 정도였고, 깊게 파인 상처에서 진물과 고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는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욕창이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며 그 상태에선 재활운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그리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욕창 부위가 바닥에 절대 닿아서는 안 된다며 마른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내 몸뚱이를 병실 한쪽 침상에 엎어놓았다. 엎드린 채로 하루에 한 번씩 어두컴컴한 밀실 같은 곳으로 옮겨져 커다란 오색불빛에 엉덩이를 쪼였다가 돌아오고, 몇 시간마다 간호사들에 의해 오른쪽, 왼쪽으로 체위변경이 되는 것 외엔 잠을 잘 때는 물론이고 엄마가 먹여주는 밥조차도 엎드린 상태에서 받아먹어야 했다. 그런데도 먹은 것이 소화되고 감각 없이 배설되니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벌레가 따로 없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서러움에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울 수가 없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내려온 순간부터 1년이 넘도록 차가운 보호자 매트에서 발도 제대로 뻗지도 못한 채 토막잠을 자며 나를 간호하고 있는 엄마의 가슴에 나의 눈물은 또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꽂히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가고 신기하게도 한 달 만에 욕창이 나았다. 이전 병원에서 10여 개월 동안 의사들이 날마다 소독하고 치료해도 나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욕창이었는데, 역시 지방병원과는 뭐가 달라도 달랐던 모양이다.
근전도 검사를 비롯해 몇 가지 검사가 이뤄지고, 본격적으로 재활운동이 시작됐다. “하나…둘…셋…다시 처음부터 하나…둘.” 여기저기서 물리치료사들의 엄한 호령에 맞춰 숨 가쁘게 돌아가는
물리 치료실은 마치 내일 전쟁터에 나갈 전사들의 마지막 발악의 훈련소 같았다.
‘철커덕철커덕’ 180 환자들이 팔 힘을 기르기 위해 당겨대는 운동기구 소리는 또 어찌나
살벌하게 들리던지…. 앞사람이 빠져나가고, 그가 온몸으로 뱉어 놓은 열기가 채 가셔지지도 않은 매트 위로 내 몸이 올려졌다. 그나마 조금 살아있는 어깨 신경 하나로 건장한 물리치료사의 팔에 매달려 움직여지지 않는 상체를 간신히 끌어올리기를 수십 회, 양팔을 좌우로 휘둘러
그 힘의 반동으로 옆으로 돌아눕는 연습을 또 수십 회, 커다란 탱탱볼을 배에 깔고 엎드려 후들거리는 양팔에 힘을 주고 버티기를 20분. 운동을 시작한 지 아마 3일째 되던 날이었나 보다.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뚱이가 버겁고 힘겨워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박점수 씨 언제까지 어머님이 곁에 계시면서 모든 것을 해주시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이런 약한 마음이라면 내일부터 물리치료실로 내려오지 마세요.”엎드려 울고 있는 나에게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물리치료사의 뼈아픈 질책은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무
시무시한 말은 한동안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날마다 각오를 새롭게 만들었다.
작업치료는 물리치료와는 달리 육체적으로 힘들진 않았다. 색색의 작은 나무 블록을 간신히 집어 올려 구멍에 꽂고, 꼼지락하지 않는 양손으로 고무 점토를 잡아 뜯고, 숟가락으로 콩을 퍼서 다른 그릇에 옮겨 담기 등등 주로 유치원에서 내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했던 학습교구
들이었다. 다섯 살 어린 반 아이들도 쉽사리 하던 것들이었는데…. 순간순간 움직여지지 않는 내 열 손가락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온종일 빡빡하게 짜인 재활 치료과정은 대략 저녁 6시쯤이면 모두 끝이 난 것으로 기억된다. 하루치의 고된 운동량을 온몸에 무겁도록 싣고서 병실로 돌아오면 언제나 맛깔스럽지 않은 저녁밥이 병실마다 날라져 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거기서 나의 일과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서 이제 숨 좀 돌리나 싶으면 또다시 엄마에게 이끌려 환자들을 위해 개방해둔 작업치료실로 향해야 했다. 재활병원이라는 특성상 환자들 대부분이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의 몸이 된 사람
들이었기에 재활운동을 열심히 해서 꼭 예전처럼 건강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보호자들의 의지 또한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밤마다 작업치료실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보호자들 간에 치열한 몸싸움과 눈치작전이 벌어지곤 했다.
엄마는 물론이고 나 역시나 여느 환자들처럼 재활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걷지는 못하더라도 혹여 목발이라도 짚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니, 적어도 손가락 정도는 움직여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재활 치료란, 말 그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치료를 통해 합병증을 예방하고 몸에 남아 있는 기능을 이용해 일상생활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것일 뿐, 의학적으로 한번 끊어진 신경세포는 신이 내린 기적이 아니고서는 재생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또 다른 재활병원을 옮겨 다니는 동안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느리지만 내 힘으로 휠체어를 밀 수 있게 되었다. 다치고 처음, 휠체어는커녕 어쩌면 남은 일생을 누워서만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앞으로 나 어떻게 살지? 엄마, 차라리 나 죽을래. 나 죽게 해 줘.” 그리 서럽게 울며 엄마의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박아놓고서 절망에 빠져있던 때를 생각하면 희망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의 재활은 끝났으니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지 말고 퇴원해서 집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의사의 최종명령이 떨어졌다. 솔직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기쁘고 좋았다. 꽃잎이 흐드러지게 날리던 어느 봄날, 예쁘게 차려입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던 건강한 모습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좋았다. 그동안 환자들도 입에 맞지 않아 숟가락을 내려놓기 일쑤였던 병원 밥을 드시며 편안한 잠자리 하나 없이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니 무작정 좋았고, 애
달프게 그리운 형제들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좋았고, 찌든 소독 냄새와 더불어 날마다 이어지는 지옥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문득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다’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이 생각난다. 돌이켜 보면 내게 재활병원은 마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은 곳이 아니었나 싶다. 타들어 가는 목마름으로 갑자기 불어닥친 모래폭풍을 헤쳐 겨우겨우 나왔나 싶으면 또 다른 모래언덕이 나오고 그러다 때론 걷잡을 수 없는 모래 늪에 빠져 좌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서 이 고통 역시 곧 지나가겠지. 오늘 고됨보다 좀 더 나아진 내일이
있으리라는 푸른 오아시스 같은 희망이 있었기에 견디고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살아가다 보면 사막의 모래언덕 같은 힘든 고비를 수없이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는 앉을 수도 없는 몸, 이번처럼 40도가 넘는 고열로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될지도 모르고, 엉덩이의 욕창으로 인해 또 몇 날을 고통스럽게 엎드려 생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험난한 여정 속에도 언제나 삶을 이어주는 푸른 오아시스 같은 희망이 함께 한다는 것을 믿기에 오늘도 나는 거센 모래폭풍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남은 선인장처럼 굳세게 이겨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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