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나비
안과 밖은 두 겹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한살이 내내 빛과 그늘로 기운 고치 하나 위대한 유산을 품고 있다
허물을 벗고 벗어도 희망은 보이지 않아 영혼의 가출을 기다리고 있다
퇴화된 기억 대신 돋아난 더듬이마저 짓물러져
우화를 기다리는 병실에서
잠결에 날개를 밀어 내려는 저녁의 난간,
산소 호흡기에서 빼낸 링거 줄로
시간의 목을 조른 광대뼈에는 살의의 표정이 없지만
의도를 숨기고 찾아온 불나방들
나비의 운구가 유리창인 건 몰랐겠지
납작하게 접힌 약 봉투를 펼치며, 분, 분, 분, 서로 떠드는 음성이 위독한 밤,
실은 철제 침상에 박제된 표본 하나가 감쪽같이 창밖으로 사라진 뒤 였다
손 없는 날
꽃 한 송이가 나프탈렌 냄새와 떠난 날
우리는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공깃돌을 고르며
천정부지로 치솟은 장수하늘소의 가격을 이야기했다
알약 한 알 집어 들고 고개 한 번 쳐들고
모든 아이에게 열 달 동안 살 집을 마련해준 할머니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먼지가 날아가는 쪽으로
발 없는 소문들이 따라가기 좋은 날
우리는 아파트 공터에 버려진 장수돌침대와
우리들의 아버지를 닮은 이스터섬의 석상들 크기를 비교했다
아무 말 없이 말벌 집을 없애준 이웃들과 아직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아이들의 안부를 나누고
비가 공평하게 내리기 시작한 저녁
우리는 불어터진 자장면을 삼키며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몽고반점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신문지가 젖을수록 불행이 겹쳐 올 것만 같아
가위바위보, 내일의 운세를 점치며
한 칸 한 칸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별이 떨어지기 좋은 밤,
플라스틱 빈 그릇에
은하수가 아득히 고이기 시작한 우리들의 첫 날
모두가 울고 있는
낯선 곳이었다
백두대간 시드볼트
씨간장이 바닥났다
붉은 동자꽃 씨앗과 하얀 백당나무꽃 씨앗이 항아리로 떨어졌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기의 이름을 지어놓은
김씨네, 이씨네, 박씨네가 한통속으로 굶주리던 보릿고개 너머,
옛 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듯 씨앗을 지켜갈 종갓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내일의 운세를 맡긴 날부터
배꼽 없이 부푸는 아지랑이
꼬물거려도
끝 모를 동면을 위해 마지막 눈물의 씨앗까지 받아 두었다
서로의 생사도 묻지 못한 채,
웅크린 얼레지, 소리쟁이, 쑥부쟁이, 짚신나물, 미치광이풀, ……
먼 훗날 돌아올 사람의 아들을 위해 암호 같은 이름도 받아 두었다
전기가 끊겨도 폭탄이 터져도 모르던
백두대간 오지에는
어떤 종자인지 밝히지 못한 어린 미망인이 씨받이밭을 일구던 마을이 있고
씨간장 항아리를 땅속 깊이 묻은 날부터
청양고추를 문대도 더 이상 피가 돌지 않는 대지는
불멸을 꿈꾸는 상상임신 중,
샛별이 쏟아져도
가냘픈 산도 같은 꽃봉오리
홀로 시든
자궁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검은 석류, 차도르
당신을 몰래 만났습니다 밤은 우리를 감싸고 우리는 얼굴만 내놓았
습니다
그믐밤,
아궁이를 열고 연탄을 갈아줍니다
시큼한 것이 당깁니다
불꽃이 일렁이면 불모의 사막에 주저앉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달만
큼 오아시스를 향한 갈증도 남아 있습니다
석류 하나를 집어 듭니다
늦가을 수확기라서
알갱이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수류탄처럼 잘 터지는 눈물이 방울 방울,
우리는 잘 울지만 일란성 쌍생아라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차도르,
스크린 틈으로
총구를 클로즈업합니다
기다란 마스카라 아래
그늘에 가려진 커다란 눈
흑백영화 시절엔 불경기도 괜찮다고 말했던가요
그렇다면 지금쯤은 폐경기겠죠
고양이의 뾰족한 손톱을 볼 때마다
빨간 풍선이 떠오릅니다
아직은
웃음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안 양탄자처럼 멀리 날아가는 연기를 향해
주먹을 펼칩니다
차도르, 차도르,
카메라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빵빵 울리는 경적에도
아랑곳없이
굴러가는 석류입니다
차가운 도시 여자의 롱테이크
극장 밖까지
깜깜한 리얼리즘입니다
수박모자이크바이러스
수박을 두드립니다.
구멍 뚫린 비닐하우스로 파리가 꼬이고 지구가 무럭무럭 익어갑니다.
태풍의 이름들을 기록하던 습관대로 여름 과일들을 적색목록에 올
리는 열대야
불의 고리가 커갈수록 산달은 가까워지고 태양이 흑점을 품고 있다
는 소문이 지구공동설을 채우고
이글대는 불볕,
움푹 팬 이빨 자국마다
단물 빠진 싱크홀이 생겨나
산성비가 내리긋는 임신선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드레스코드는 레드, 수박 한 덩이를 치마 속에 감추던 엄마는
사라졌습니다.
북극곰이 물어뜯고 있는 달의 배꼽이 떨어질까,
오로라가 새파랗게 질린 극야의 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 칼을 대야 할 것 같습니다.
온실에서 자란 탓일까요?
환태평양 조산대부터 자오선이 쩍, 쩍, 갈라집니다.
코드레드, 코드레드,
서둘러 시체는 모자이크 처리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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