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퇴원
오래 묶여있던 매듭을 풀고
캄캄했던 한 시절을 향하여 결별의 손을 흔들 무렵
빛이 내린다 천천히
몽롱한 의식의 끄트머리를 적시며 차오르는 미명의 숨결
바람은 숨죽여 누웠던 동굴에서 빠져나와
펄럭이는 나뭇잎마다 눈부신 몸짓을 풀어놓고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찾아온 안개는
한 사내의 뭉클한 전율이 되어
혈관마다 싱싱한 충동으로 치닫고 있다
뒤척일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병실 침대 위엔
발이 묶인 인연들이 서성거리고
함께 떠나지 못하는 인연들은
또다시 외로와야 할 시간을 위해
아쉬움과 먹먹함이 이루는 경계 위에 앉아
아름다운 슬픔의 양식을 삼키고 있다
잘려나간 한쪽 발목 어림에는
여전히 결빙의 계절이 싸늘한 눈발로 휩쓸며 내달리고
블랙홀처럼 깊어가는 곤궁의 늪 속에서도
결코 침몰하지 않는 아내의 음성을 들으며, 사내는
언제나 어스름처럼 왔다가 미명으로 사라져갈 어둠의 급소를 겨누고
날카로운 분별의 화살을 날려보낸다
의족을 끼우고 겨드랑이에 목발을 단단히 붙이고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힘주어 일어서면
한쪽 팔을 어깨에 올리고 걸음의 보조를 맞추는 아내는
헤아릴 수 없는 뜨거움으로 허리를 감싸안고
그 뜨거운 온기에 동 트는 섬 하나처럼 불현듯 눈을 뜨는
신비스런 삶의 경험을 한다
잠시 혼미한 날들 속에서 몸부림치던 부끄러운 흔적을 날려버리고
생활의 갈피마다 층층히 쌓여드는 고뇌를 풀어내어
크고 넉넉한 물길 이루어 세월 저편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저 뚜렷한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사내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세상을 향해
뜨거운 생명의 펄떡임이 되어 흐르게 하기도 하고.
해바라기
가끔
동사무소 복지담당자가 방문하는
뇌병변3급 장애를 안고 사는
괭이부리마을 그 집에는
키 작은 해바라기 한 그루 함께 산다
바퀴가 달린 화분에 담긴
발을 뻗어도 늘 고만고만한 깊이뿐인 세상
그러나 그 집의 해바라기는 건강하다
불평을 모르는
가끔 베란다에서 현관 앞까지 외출하기도 하는
그 집의 해바라기는 참 바보 같다
지나가는 바람과 수다를 떨고
베란다 유리창을 넘나드는 뉴스에 귀 기울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하는
그 집의 해바라기는
이 땅 어디서나 만나는 둥글고 넓적한 얼굴로
치마폭 가득 보석 같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저 빼곡히 키우는 아이들을 위해
말없이 길어올리는 물과 햇살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참으로 소중한 것들은
오랜 수고와 기다림을 자양분 삼아
비로소 형상의 옷을 입는 것은 아닐까
방문할 때마다 슬그머니 요구르트 한 병을 내미는
그 집에는
팔월의 사막 위에 불쑥 솟아오른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해바라기 한 그루
함께 산다.
가을에 취하다
1.
또 한 번의 계절이 깊어갑니다
먼 길 떠날 예감으로 숨겨두었던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약간의 씁쓸함을 풀어내어
가볍게 몸을 떠는 나뭇잎들 위에
마지막 만찬처럼 눈부신 햇살이 내립니다
문득 쏟아지는 햇살을 간추려 모아
마음 허공에 등불 하나 밝힙니다
때론, 내 어둑한 귓속
그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을 모두 밝히는
외등 같은 등불 하나 높이 켜들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대여
이렇게 투명하게 깊어가는 가을엔
누군들 마음의 빗장을 열어두지 않을까요?
2.
안개가 내립니다
으슥한 마음 곳곳 적시는 안개
그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누군가 뱉어낸 신음 한 토막
꿈틀대는 것이 보입니다
허연 내장이 흘러나오는 해삼 토막 같은
그리움 한 점
안간힘으로 씹어넘기며 중얼거립니다
그래, 살자
이 어두운 귀로도 질기게 살아보자
산낙지처럼 꿈틀거리며
더욱 붉게 살아보자고.
정월대보름 달을 보며
더러는 묵념을 하고
더러는 합장을 한 채 기도문을 웅얼거린다
번제를 드리는 먼 나라의 백성들처럼
정월대보름 만월을 향해
바닷가에 서서
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며
기억의 층계를 거슬러 오르면
마디마디 저려오는 아쉬움과 후회의 관절통
어디 있는 것일까?
너와 내가 꿈꾸는 가나안 땅은
끝내 가닿아야 할 신기루 저편
숱한 난파의 해역을 건너온 흔적 위에 나부끼는
오늘의 깊이를 헤아리며
내일이란 바다를
다시 어디로 떠돌 것인가를 생각한다
귀밝이술 한잔으로는 도무지 해갈되지 않는 난청을 안고
낙타 무릎 닮은 저린 무릎을 끌며
한 조각 목숨의 그림자를 어디에 눕힐 것인가를.
오후 네 시
살아있음의 키를 키운다
너무 쉽게 잊혀지는 이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하여
두 발을 힘주어 딛고 서서
변심한 애인이 되어 곁을 떠난 세월의 뒷모습을 본다
겨울 커피숍에서
뜨거운 찻잔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간을 두고 일어설 때
결별한 중년의 부부처럼 허연 머리카락 날리며
그저 말없이 묵묵히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 때문에 더더욱 매몰차게 떠난 한 시절을 본다
어쩌면 거대한 왕들의 무덤처럼
혹은, 이름 모를 신들의 사원이 조금씩 낡아가는 것처럼
가슴이 허물어져 가는 이것 또한
타성에 젖으며 시간의 강을 건너가는 방법일까
구직급여를 신청하러 가는 길에
가벼운 근심들은
간지럼을 태우듯 살을 열고 들어와
가만가만 뿌릴 내리고
실업자 교육을 마치고 나선 고용센터 건너편 커피숍 창가에 앉은
오후 네 시의 쓸쓸함 속에서
멀쑥하게 키만 자라는 내 근심의 잡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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