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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026 민들레 문학상 가작

8월, 그리고 11월의 콜라쥬외 4편

이석재

8월, 그리고 11월의 콜라쥬

여동생의 부고를 듣고 들른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강둑 아래 작은 마을은 조용했다

강둑에 올라 강 건너 저편을 바라보면

그곳엔 독산마을이 있고 그 옆에 웅크린 마사리

마사리 앞 갈밭에는

독산마을 출신인 생모가 버리고 간 기억의 발자국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남아있다

낙동마을에서 독산마을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강을 가로지르는 교각들

그 교각들의 허벅지쯤에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오는

저녁의 얼굴이

잊혀진 기억 속 이름처럼 흑백으로 빛나고

강 건너 그곳 김해 땅엔 무엇이 있는 것일까?

11월 마지막 주 수요일

밀양화장장에서 유골함에 담겨 돌아온 여동생은

왜 강 건너 김해 땅이 보이는 언덕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오래전, 삼랑진에서 잘나가던 레스토랑을 접고

김해시로 나가 해물탕 가게를 운영하다가

IMF 유탄에 맞아 신용불량의 상처를 입고 돌아온 동생은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 삼랑진에서 김해까진 갔는데 거기서 발이 묶였어

깔깔대며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에 속내를 숨겼었다

무척산 공원묘지에 사십 년 전 8월에 몸을 눕힌 새어머니는

강 건너 이편 삼랑진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자식 전실 자식 가리지 않고 치마폭에 품었어도

마음에 담은 제 자식만은 각별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키가 작고 가슴이 넉넉했던 어머니, 지금쯤 딸래미를 만났을까?

새어머니가 떠난 팔월의 기제사가 돌아오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강둑에 서서 저물어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 먼저 가신 어무이가 그리운 게요?

- 씰데없는 소리 말고 내일은 봉분이나 보고 오이라

타박하는 아버지의 음성은 8월의 땡볕 속으로 허방허방 흩어졌다

이젠,

어머니도 떠나고

아버지도 떠나고

동생마저 떠나버린

강둑 아래 휑한 고향집

낡은 액자에 담겨 바람벽에 걸린

조각조각 흑백으로 인화된 콜라쥬 작품 같은

한 가족의 흔적이

강 건너 그곳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겨울 소나타

그녀의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면서

오래 만나지 못한 이름들이

요양병원 옥상 공원

플라스틱 의자 곁에 나동그라져 있다

하오를 적시는 빗소리가

낡은 의자를 타고 흘러내린다

버려진 발자국들의 체온이 식는다

바람이 지나간 길을 따라

하얀 귀 쫑긋 세우고 달려와 파도 소리로 엎드리는

바다가 보이는 병실

마스크 속에 불안을 숨기고

외롭기 알맞은 거리를 재며

안개가 눈을 휩뜨는 아침이면

침묵 한줌 안개 한줌 넣은 비빔밥을 먹는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아도 낮게 신음하는

배 아파 낳았어도 이젠 낯설기만 한 자식을 닮은

바다의 음흉한 속내

저 혼자 떠들고 있는 TV의 뉴스처럼

무성한 망각의 가시덤불을 베어 넘기면

환절기마다 찾아드는 새들이 남기는

새로운 기호들을 만날 수 있을까?

밤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점령하는

망각 세포의 유혹 앞에서

하얗게 까무라치며 눈을 감는 기억들은

다시 어디에 묻어야 할까?

사람의 냄새가 지워진

바다가 보이는 요양병원 병실

창가 침대 위에 앉은 그녀는

아침마다 사람이 사람으로 부대끼는

그리운 온기를 더듬고 있다.

기억의 타투 · 1

– 갈대, 혹은

어두운 귀를 가진 사람의 깊은 상처는

달빛으로 감싸 안고

온몸을 웅크려 버텨내야 한다

바람 불면

자욱한 고요 속에서

지치고 야윈 몸은 정신없이 흔들린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빼앗기는 체온에도

입속은 쉽사리 버석버석 메말라간다

시월 보름, 텅 빈 골목에 주저앉아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을 다독이며 건너가는

이 미친 바람 부는 세상살이

어두운 무대를 외발자전거를 타고 도는

쓸쓸한 춤사위로 밤새워 흔들리다가 불현듯 닿는

푸르스름한 새벽의 퀭한 눈길

새삼 옷깃 여미며 고개 숙여도

바람에 헝크러지는 머리카락처럼 솟구치는

이 승질머리는

끝끝내 숨길 수 없는

내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자존심이다.

기억의 타투 · 2

– 부표

청각장애의 이름표를 달고 건너가는 세상은

날마다 푹푹 빠져드는 수렁이었다

허리춤을 끌어당기는 유혹은

자주 찾아드는 노을만큼 붉게 출렁거렸고

그 유혹을 견디는 몸부림은

끊어지기 직전의 가느다란 현처럼 팽팽하였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땡볕 아래 하루 종일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귀가 어둡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그러나 누군가는 지켜내야 할 좌표 하나

지켜내야 할 것을 꿋꿋하게 지켜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가끔 물새들이 읽고 이내 잊어버리는 이름표에는

실험실의 시약병처럼 숫자나 알파벳 대문자가 적혀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

굽어진 물길 가장자리

데칼코마니 같은 아침과 저녁노을을 만나는

이 자리에선.

기억의 타투 · 3

– 망초꽃

비가 올 때마다

그 여자 망초꽃처럼 웃었다

첫 남편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고

배 타던 두 번째 남편도 물길 따라 떠나보내고

삼대독자 아이 하나 대 이으라고 줘 버리고

소주 한잔 마시며

저녁부터 새벽까지 꺽꺽거리며 웃었다

맨몸으로 떠돌며 봉제 공장 다니다가

눈 맞은 트럭운전수 셋째 배필로 맞아들여

딸만 내리 세 명 두고 모진 시집살이 허덕이며

너처럼 볼품없이 헤롱거리는 몰골로 웃어대다가

십 년 세월 저물기도 전 이혼 도장 쾅쾅쾅 찍어버리고

까짓것 이 한 몸 어딘들 눕힐 곳 없으랴

두 딸내미 끼고 경기도며 충청도며 부산까지 떠돌던 여자

네 번째 서방 만나 지지리궁상 떨며 살아도

시커멓게 탄 안색으로

별별 암이랑 병이랑 친구로 찾아들어도

해맑은 웃음 퍼올리며

반편 같은 몰골로 생활의 강을 건너가는 여자

너를 볼 때마다

내 청각장애의 어두웠던 골목마다 불을 밝혀주던

그 여자 얼굴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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