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밀밭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그곳에서 마치 천천히 흐르는 강물처럼 느릿하게 흘렀고, 계절
은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조용히 바뀌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길 잃은
나그네처럼 들판을 스쳐 지나갔고, 햇살은 금빛 실을 풀어 놓듯 밀밭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밀들은 서로 몸을 부딪히며 파도처럼 일렁였고,
그 모습은 마치 땅 위에 펼쳐진 바다가 숨 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소리는 낮고 부드러워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지
만, 분명히 살아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들판 한가운데에는 허수아비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된
나무 기둥 위에 묶여 있었고, 몸은 마른 짚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낡
은 헝겊은 바람에 닳아 가장자리가 해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덧댄 흔적
들이 시간의 층처럼 겹쳐 있었습니다. 얼굴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지
만, 비와 바람에 씻겨 내려가 이제는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
치 감정을 잊어버린 하늘처럼 비어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말할 수
도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들
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을 혼자서
끝까지 지키고 있는 존재처럼.
어느 봄날 아침, 햇살이 막 눈을 뜬 듯 부드럽게 퍼지던 시간에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들판 위로 날아들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초롱이였습니
다. 초롱이는 호기심이 많아 바람보다 먼저 움직이는 마음을 가진 새였
습니다.
“여긴 처음 보는 곳이네!”
그는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들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우와, 여긴 엄청 넓다.”
그의 눈은 반짝이는 구슬처럼 빛났습니다. 그러다 문득 허수아비를
발견했습니다.
“어? 저건 뭐지?”
초롱이는 날갯짓을 천천히 줄이며 조심스럽게 내려왔습니다. 그리
고 허수아비의 어깨 위에 앉았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잔잔
해졌습니다. 낯선 곳인데도 오래 알고 있던 자리처럼 편안했습니다.
“안녕? 나는 초롱이라고 해.”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습니다. 허수아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았습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잠시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초롱이는
금세 웃었습니다.
“아, 말 못 하는구나. 괜찮아. 내가 말하면 되지.”
그는 그렇게 혼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숲에서 친구들과 있었
던 일,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갔던 날, 비를 일부러 맞았던 이야기까지.
말은 계속 이어졌고, 허수아비는 그 이야기를 고요히 받아들이는 빈 그
릇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초롱이는 매일 들판을 찾았습니다.
“나 또 왔어. 오늘은 말이야, 엄청 재밌는 일이 있었어. 근데 있잖아,
가끔은 이유 없이 기분이 이상할 때도 있어.”
그의 이야기는 점점 길어졌고, 점점 깊어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작
은 꽃잎을 물어왔습니다.
“이거 너 줄게. 예쁘지?”
허수아비의 어깨 위에 올려두며 말했습니다.
“네가 웃을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라도 같이 있으니까.”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계절은 색을 바꾸며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었습니다. 허수아비의 몸이 크게 흔들렸고 헝겊
이 바스락거리며 울었습니다.
“너 혹시 힘든 거야?”
초롱이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불었습니다.
짚이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초롱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게 네 대답이구나.”
그는 허수아비의 어깨를 살짝 쪼았습니다.
“괜찮아. 내가 매일 올게.”
그날 이후로 초롱이는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오늘은 좀 속상했어. 친구가 나한테 화를 냈거든. 근데 내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해.”
그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허수아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점점 따뜻하게 느껴졌습니
다. 마치 말없이 등을 내어주는 존재처럼.
가을이 더 깊어졌습니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차츰차츰
빛을 잃어갔습니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고, 공기는 마른 종이처럼 바
스락거렸습니다. 그날,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건 누구지?”
초롱이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다가 멈췄습니다. 농부였습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허수아비 앞에 섰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 돼….”
초롱이는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만둬!”
그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습니다.
“그건 내 친구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람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허수아비
를 붙잡았습니다.
“안 돼, 제발….”
짚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한순간,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짚이 쏟
아지고 헝겊이 떨어졌습니다. 허수아비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했습니다.
초롱이는 그 위를 맴돌며 울었습니다.
“일어나…, 제발….”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들판은 다시 조용해졌고, 바
람만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들판은 하얀 침묵으로 덮였습니다. 초롱이는 더 이
상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끔 그 자리에 왔지만 오래 머물지 않
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 속에서 낡은 헝겊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아, 너구나.”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나 늦었지.”
바람이 조용히 스쳤습니다.
“그래도 왔어.”
그는 헝겊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습니다.
“이제는 알아. 넌 없어지지 않았어.”
봄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들판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운 허수아비가 세워졌습니다. 초롱이는 멀리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
다.
“…너는 아니네.”
그는 작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천천
히 날아가 어깨 위에 앉았습니다.
“안녕.”
그리고 헝겊 조각을 묶었습니다.
“이건 내가 아끼는 거야.”
그는 숨을 고르고 말했습니다.
“나 이야기해도 될까?”
바람이 불었습니다.
“예전에 말이야, 여기 친구가 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습니다.
“말은 못 했는데…. 다 듣고 있었어.”
헝겊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초롱이는 미소 지었습니다.
“맞아. 그런 느낌이야.”
그는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나 이제 알아. 사라지는 건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는 가슴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여기 있거든.”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래서 나 계속 올 거야.”
바람이 들판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밀들이 파도처럼 일렁였습니다.
초롱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잘 들어야 해. 내 이야기 길거든.”
그날 이후로 초롱이는 계속 들판을 찾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더 조
용해졌지만, 더 깊어졌습니다. 들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바람
은 여전히 불고, 햇살은 여전히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초
롱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 것
과 함께,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독자의 답장 (0개)
아직 답장이 없습니다. 첫 답장을 남겨 주세요.